< 법인세 논쟁에 대한 간단한 생각 > 일반경제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법인세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 오는 듯 하다. 자세하고 어려운 설명은 조세재정전문가들께서 해 주셔야 하고, 유권자인 일반 시민들을 위하여 (실제로는 모자란 내 능력범위를 감안한) 경제원론 수준의 기본적 내용만 짚고 넘어가 보려 한다.

한국의 법인세가 명목세율은 높은데 실효세율은 낮으니 하는 논쟁은 사실 기본적 질문을 한참 거친 후에 나와야 적당한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점심메뉴를 아직 결정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회사앞 식당의 설렁탕이 딴 집보다 싱거운지 아닌지를 싸우는 꼴이다. 최종적 결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 번은 던져 봐야 하는 질문이고, 때로는 결정에 의외로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지엽적인 요소라는 뜻이다.

법인세 논쟁을 보면서 오늘의 점심메뉴를 고를 때 나오는 수준의 날카로운 지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세금의 기본적 속성부터 하나씩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1) 모든 세금은 필요악이다.


세금을 많이 낼수록 행복한 사람은 없다. 나 말고 남이 내는 세금이라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간혹 있겠지만 그런 심성을 가진 분은 그냥 이 글을 그만 읽어 주시면 되겠다. 아무튼 모든 세금인상은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경우에 부작용과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간신히 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는 많이 내니까 우리도 올릴 수 있다'라고 쉽게 주장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2) 모든 세금은 사람이 내는 것이다.


세상에는 온갖 명목의 다양한 세금이 있지만 결국 이를 부담하는 것은 사람이다. 세금은 돈에서 나오고, 돈은 결국 누군가 벌거나 갖고 있거나 쓰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법인세의 경우에는 흔히 오해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기업도 사람의 모임일 뿐이다. 기업에 법인세를 부과하면 '기업'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과 연관된 '사람들'이 세금을 낸다. 그러면 왜 그리 다양한 세목이 있냐고? 거위의 털을 뽑는 다양한 방법일 뿐이다. 거위의 입장에서 보면 목에서 뽑히나 가슴에서 뽑히나 엉덩이에서 뽑히나 어차피 모두 자기 털이다.


3)국세청에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이 실제로 세금을 내는 사람은 아니다.


친구들과 식당에 갔다. 돈을 내는데 (1번) 계산서를 각자 받아서 따로 나간다 (2번) 한 사람에게 돈을 몰아주고 그 사람이 대표로 계산을 한다. 이 때 1번과 2번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계산대 앞 풍경은 다를지 몰라도 실질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세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명목으로 누가 세금을 납부하든 지 간에 그 세금이 결국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왔는지는 따로 평가해야 한다. 이는 '조세의 전가(tax incidence)'라고 해서 초급 경제원론 시간에 배우는 내용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부가세는 사업자가 모아서 납부하지만 실제로는 소비자와 사업자가 나누어 부담한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부가세가 붙으면 상품가격이 비싸지는 방식으로 자신도 이를 부담한다는 것을 알지만 평소에 상품가격이 비싸다고 불평할 때는 보통 그 부분까지 고려하게 되지는 않는다.

법인세의 경우에는 이보다 혼란이 훨씬 더 큰데, 부담하는 주체가 여럿이고 어떤 식으로 부담하는 지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법인세는 기업과 관련된 '사람들'이 분담하여 낸다. 여기에는 주주, 종업원, 소비자, 심지어 하청업체까지 포함되어 있다.

법인세를 실제로 누가 많이 부담하고 있느냐에 대한 경제학적 연구는 넘쳐나지만, 명확한 결론은 없다.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대전제는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이 부담한다'이다. "아 힘들어 못해 먹겠어, 때려 치우든지 딴 데로 가든지 해야지"라는 말은 누구나 하지만 현실은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오늘날과 같이 자본과 상품의 이동이 자유로운 개방경제에서 기업과 관련된 사람들 중에 가장 아쉬운 사람은 누구일까? 자본이나 소비자보다는 종업원이나 하청업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자신의 임금이 오르지 않거나 깎이고, 하청업체가 가격 후려치기를 당하는 순간, 나아가서 직장과 거래처가 외국으로 사라지는 순간에는 법인세에도 책임의 일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기는 어렵다.

물론 상황이 늘 이렇게 흘러간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실증적인 문제이므로 실제로는 주주에게 대부분의 부담이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주주 중에서도 누가 더 부담하냐고 하면 물론 주식 보유 비중에 따라 비례적으로 부담할 것이다. 한 가지 문제는 모든 주주들이 고액 자산가나 재벌총수는 아니라는 점이다. 더구나 재벌총수는 원래 주식비중은 적으면서 경영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욕먹는 사람들 아닌가? 총수가 1%의 지분만으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면 법인세 부담도 1%만 할 것이다.


4) 모든 세금에는 부작용이 있지만 성격은 다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소득세를 올리면 소득창출 행위가 줄어들 것이고, 부가세(소비세)를 늘리면 소비가 위축된다. 법인세를 늘리면 기업활동이 위축된다. 이 모두가 줄어들고 위축되어서 좋은 게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왜곡은 어차피 있는 것이고, 초점은 어떤 것이 그나마 부작용이 적고 그나마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고, 처한 상황마다 다르며, 영원한 논쟁거리다. 고소득자라면 돈 만을 위해 일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누진세로 인한 근로의욕 감퇴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같은 이유로 완전히 반대일 수도 있다). 소비세로 소비가 위축되면 대신 저축과 투자는 많이 할 테니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 (하지만 소비부진이 문제인 상황에선 자살행위가 될 수 있다). 투자할 곳이 없고 사업전망이 나빠 기업활동이 위축되고 해외로 이전하는 것이지 법인세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다 (그러니까 비수를 꽂아도 된다?).

무엇이 더 중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대가를 치르지 않는 선택은 없다는 것이다.


5) 정치적 수용가능성


지금까지 읽으셨다면 "얘는 법인세 인상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으셨을 것이다. 그렇다. 내 입장은 "세금은 가능한 적게 걷을 수록 좋지만 꼭 걷어야 한다면 법인세보다는 다른 세금부터 올리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증세가 불가피하고 실천 가능한 방법이 법인세 인상밖에 없다면 그게 대안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내가 아무리 햄버거가 균형잡힌 최고의 음식이라 믿어도 같이 식사할 동료들이 설렁탕이 좋다는데 끝까지 우기다가 굶을 수는 없지 않은가?

법인세는 정치적 수용가능성 면에서는 확실히 잇점이 있다. 누가 실제로 부담하는지도 잘 모르고 따라서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도 눈에 바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세금에 비해 국민적 반발 정도가 덜하다. 연말정산 때 공제만 조금 줄어 들어도 좌우협동 대란이 일어나는 우리나라에서 이는 중요한 잇점이다. 정치인들, 특히 대중영합적 포퓰리스트의 관심을 더 끌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사정을 좀 아는 사람일수록 곱게 보이지는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비난만 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증세가 꼭 필요하고 법인세 인상이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나은 선택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 결론


책임있는 경제학자인척 하는 사람으로서는 열린 결말이 좋을 듯하다. 법인세 인상은 우리 경제에 최선은 커녕 최악일 수 있지만, 그나마 가능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는 정도면 적당하겠다.


PS. 

하지만, 순진한 나로서는 정공법을 택하는 후보가 나타나기를 열망한다. 먼저 왜 정부지출 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인지부터 설명하고, 다음으로 손쉬운 증세보다는 세출조정과 정부효율성 강화부터 먼저 할 것임을 선언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증세액에 대해서는 모두가 나누어 부담하자고 호소하는 그런 후보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보장세와 같이 지출목적이 확실히 드러나는 세금을 신설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세원으로는 급여부담금이나 부가세를 인상하는 것이 좋다고 보지만 너무 디테일한 얘기가 되니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 


< 김재익 컴플렉스, 안종범, 그리고... > 법제도와 정치

내가 유학했던 학교의 경제학과 건물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실물크기 초상화가 걸려 있다. 1990년대에 새 빌딩을 지어 이사를 가면서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 김재익 수석을 기념하는 방을 하나 만든 것이다. 나는 바로 그 방에서 박사학위 논문의 최종심사를 받았다.

젊은이에게는 영웅이 필요하다. 롤모델이어도 좋겠다. 김재익은 한 경제학도의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위기에 처했던 한 나라의 경제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 매년 30%씩 오르는 게 당연하던 물가를 한 자리수 이하로 잡았고, 금융실명제, IT산업 진흥, 시장개방 및 자율화를 추진했다. 당시로서는 전혀 당연한 어젠다가 아니었고 반대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비전은 이후 30여년 동안 우리경제가 따라가게 된 (일부는 아직도 채 따라가지 못한) 길이 되었다. 그가 아웅산 테러로 불의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물론 사람의 일은 알 수 없긴 하다.

김재익은 전두환의 가정교사이자 경제수석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독재자의 부역자였던 셈이다. 그런 김재익을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정치적으로 나와 반대되거나 심지어 모두가 미워하는 이의 밑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경제학자로서 뜻을 펼치고 세상에 공헌할 수만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은연중에 그런 생각이 자리잡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치는 정치고, 경제는 경제아닌가 말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한국도 더 이상 1980년은 아니고 나도 김재익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래도 김재익 컴플렉스는 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안종범 수석의 일이 꽤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을 보니 말이다. 나는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석에서 한 두번 만난 적이 있다. 어느모로 보나 정상적인 경제학자이고, 옳은 판단력을 갖춘 사람으로 보였다.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서 한 사람의 경제학자로서 역할을 하다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안종범 수석이 왜 나락에 빠졌는지, 그가 큰 벌을 받아 마땅한지 아니면 억울한 면도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 듯 싶다. 나는 그가 원래부터 권력의 해바라기나 탐욕의 화신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권력의 틈새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키는 데 실패한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본다. 나라면 과연 다를 수 있을까? 나 스스로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남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높다.

어쩌면 오랜동안 가지고 있던 김재익 컴플렉스를 완전히 놓게 되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뭐 어떤가? 스스로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더 이상한지도. 아무튼 내일은 아들과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이다.


< 보스턴 학살 > 법제도와 정치

문득 생각이 났는데 예전에 미국에 갔을 때 우연히 미국의 제2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일대기를 다룬 미니시리즈를 본 적이 있다. 첫 회였는데 존 애덤스는 1770년에 일어난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이라고 불리는 사건에서 피고인 영국군인들의 변호를 맡는다.

보스턴 학살은 한 영국인 병사와 가발을 맞추는 상점의 사환 간에 일어난 사소한 시비가 집단 시위로 번졌고, 위협을 느낀 영국군의 발포로 다섯 명의 시민이 죽은 사건이었다.이 사건은 당시 영국지배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좋지 않았던 감정과 관련이 깊다. Paul Revere나 Samuel Adams같은 이른바 '애국자들(patriots)'은 이 사건을 독립운동의 불씨로 삼기 위해 열심히 반감을 부추기는 선전에 나섰다. 불과 6년 후 미국독립선언으로까지 이어졌으니 성공한 셈이다.

아무튼 이미 잘 나가는 법관이자 정치적 명성도 있었던 존 애덤스는 만인의 공적이 되어버려 아무도 감히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았던 영국 군인들을 변호해 줄 것을 의뢰받는다. 미니시리즈는 그가 겪었던 고뇌,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 겪는 수모와 비난 등을 실감있게 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사건에서 존 애덤스는 대단한 활약을 하였다. 결국 발포를 하지 않은 여섯 명의 군인은 무죄판결을 받았고, 발포를 한 두 명도 고의적 살인(murder)에서 과실치사(manslaughter)로 감형 받았다. 그가 남긴 변론의 일부는 지금도 미국에서 인용구로 종종 쓰인다.

"진실은 굳건한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나 성향, 또는 우리의 열정이 이끄는 방향이 무엇이든 간에, 그를 통해 사실과 증거가 바뀔 수는 없습니다."
Facts are stubborn things; and whatever may be our wishes, our inclinations, or the dictates of our passion, they cannot alter the state of facts and evidence

"유죄를 벌하는 것보다 무죄를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나 범행은 워낙 많아서 그들 모두를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무죄인 사람을 법정에 세워 유죄 선고를 하고, 혹시 사형에 처하기라도 한다면, 시민들은 말할 것입니다. '내가 죄를 범하든 말든 상관 없어.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보호받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이 시민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는다면 어떠한 안전도 다 끝일 것입니다." 
It is more important that innocence be protected than it is that guilt be punished, for guilt and crimes are so frequent in this world that they cannot all be punished. But if innocence itself is brought to the bar and condemned, perhaps to die, then the citizen will say, 'whether I do good or whether I do evil is immaterial, for innocence itself is no protection,' and if such an idea as that were to take hold in the mind of the citizen that would be the end of security whatsoever.

흥미롭게도 판결 이후 존 애덤스는 만고의 역적으로 취급받지도 않았으며, 그의 주가는 더욱 치솟았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신생국 미국의 기틀을 잡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제1대 부통령과 제2대 대통령이었고, 제6대 대통령 John Quincy Adams와 함께 최초로 아버지와 아들 대통령이기도 하다.

늘 느끼는 거지만 미국의 founding fathers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나와 소신껏 활동할 수 있었던 18세기 식민지의 성숙한 사회적 기반이 더 대단해 보인다.


< 저출산 문제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 > 일반경제

몇 주전 신문에서 읽은 내용이다. 국회 '저출산고령화대책특별위원회'란 곳에서 국회의원들께서 이런저런 돈 쓰자는 얘기와 자리 더 만들자는 얘기를 나누셨다 (물론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하나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는데, 나경원 위원장이 "저출산고령화 대책은 혁명적 사고,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면서 "다소 황당하다 싶은 정책 제안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기사링크). 

그래서 던져 본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은 바로 '저출산 문제 해결을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위원회부터 해체해야 하므로 원하던 답은 아닐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를 걱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노동력의 축소로 인한 성장잠재력의 감소라는 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사람 머릿수가 늘어나서 성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인구가 많아 GDP 세계 2위가 된 중국보다는 인구는 적어도 잘 사는 스위스나 북유럽 국가 쪽이 더 이상적일 것이다(나라 규모가 커야 국제사회에서 힘이 있다든지 인구가 많아야 그 중에서 스티브 잡스 같은 천재도 나온다든지 하는 주장은 논외로 하자).


가끔 정말로 애 낳는 기계 쯤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출산 고령화의 진짜 문제는 연금 및 의료보험 재정, 더 크게 보면 정부재정에 구멍이 나는 것이다. 보험료나 세금을 낼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데 부양해야 할 노인들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출산율을 늘려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일까? 혹시 연금제도나 정부의 지출구조를 낮은 출산율 환경에 맞춰서 조정해 나가는 게 더 맞는 답은 아닐까?


"이보쇼, 2750년이 되면 대한민국이 없어지게 생겼는데(기사링크) 무슨 한가한 소리요?"


안 없어진다. 없어지더라도 최소한 저출산 때문은 아닐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700년 후를 걱정할 만큼 한가하다면 물론 다른 걱정도 많겠지만 말이다). 시간이 가면 출산율은 조금씩 다시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 얘기는 뒤에서 더 하기로 하고, 일단은 국민의 행복한 삶이 궁극적인 목표이고, 재정압박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저출산의 흐름을 돌리는 것이 그 정도로까지 절박한 과제는 아니라는 점부터 이야기 해보자.

낮은 출산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 사회에서 생산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연령대는 보통 15~64세로 본다. 즉, 0~14세와 65세 이상은 그 사회가 먹여 살려야 할 연령계층이다. 고령화가 되니까 노인층의 확대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면이 있는데 사실은 반대로 0~14세 층의 비중이 큰 것도 사회적 부담인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이들은 나중에 생산인구가 될 것이므로 일종의 투자인 측면은 있다. 하지만 이들이 결국 노인이 되면 부양해야 할 층도 그만큼 늘어난다.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인구가 늘어나면 그만큼 자본축적도 더 되어야만 생산력이 유지된다. 실제로는 감가상각 등의 이유로 인해 저축률이 더 높아져야만 기존의 소비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요는 인구변화는 장기적 균형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이고, 한 사회 전체의 생산과 소비라는 관점에서 보면 저출산이 꼭 나쁘다고만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는데, 보통 노령인구일수록 연금이든 의료비든 정부 부담이 크고, 14세 이하의 양육비는 주로 민간이 부담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보육수당 등 정부가 부담하는 부분이 점차 커지고는 있지만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것은 주로 부모의 몫이다. 더구나 선진국이 될수록 노인복지에 드는 비용이 보육예산보다 더욱 빠르게 증가한다. 따라서 국가재정의 관점에서만 보면 14세 미만의 인구비중이 커지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부담이 되는 반면, 노령인구의 비중이 커질수록 큰 부담이 된다.

저출산에 대한 사회 전체적인 시각과 국가재정 관점의 시각 사이에 이처럼 서로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은  Lee, Mason and et al. (2014, 링크)의 주요 착안점이 되었다. 이들은 40개국의 국민이전계정(National Transfer Accounts) 자료를 활용해 각 국의 재정상황과 국민 생활수준(소비수준)을 최적으로 만드는 출산율을 각각 계산해 보았다. 한국의 경우를 소개해 보면 국가재정적 관점에서 볼 때 최적의 합계출산율은 2.07 수준이다. 반면, 자본확대의 필요성까지 감안해서 최적의 생활수준을 달성하기 위한 출산율은 1.25~1.55 수준이다. 참고로 2010~2014년 한국의 평균합계출산율은 1.23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아이를 적게 낳으면 사회적 생산도 줄지만 비용도 줄어든다. 정부가 규모를 유지하거나 지금보다 더 키우려 하고, 젊은이들을 쥐어짜 노인을 부양하는 방식인 지금의 연금제도를 그대로 놔둔다면 재정파탄을 막기 위해서는 출산율을 크게 높여야 할 것이다. 반면, 만일 국민 각자가 잘먹고 잘사는 것이 목표라면 지금보다 약간만 출산율을 높일 수 있어도 큰 문제가 없다.


출산율은 사회환경의 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나라는 뭐든지 변화가 극적이라서 문제이긴 한데 출산율의 저하는 사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특히 우리보다 선진국인 나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출산율 저하 문제를 겪었거나 겪는 중이다. 

그런데, 앞선 선진국의 경험을 보면 경제성장과 사회적 환경변화가 출산율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OECD 국가라 해도 미국, 영국, 프랑스나 북구유럽은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남유럽 국가나 일본은 출산율이 우리와 근접한 수준으로 낮다. 왜 그럴까? 아이를 낳는 것은 결국 여성이다. 따라서 여성이 그 사회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가 국가별 출산율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관련하여 Feyrer, Sacerdote and Stern(2008, 링크)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기한다. 여성의 교육수준이 낮고, 가사를 분담해 줄 노동력을 구하기 어렵거나 문화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출산율이 높다. 경제발전으로 사무직과 전문직 고용이 늘고, 여성의 교육수준도 높아지면 여성의 고용도 늘어난다. 하지만 사회적 관습의 변화속도는 이에 따라가지 못하면서 육아와 가사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 되고, 여성들이 큰 부담을 느끼면서 출산율이 떨어진다.

여기까지는 한국의 상황과도 정확히 부합한다. 하지만 Feyrer 등은 시간이 더 가면 사회환경도 점차 적응을 시작한다고 보고 있다. 아버지와 남편들의 가사노동 분담이 늘어난다. 정부 및 기업도 육아휴직이나 보육시설의 확충 등에 나선다. 궁극적으로 가정과 노동시장에서의 양성평등이 강화되면 결국 출산율도 그 사회의 인구를 유지하는 수준(합계 출산율 2.1)에 가깝게 회복된다는 것이다. 일본과 남유럽은 아직 그 단계까지 가지 못했고, 북유럽과 미국, 영국 등은 최종단계에 근접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 지는 모르겠다. 출산율도 다른 사회현상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지위라는 요소 하나 만으로 설명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진국의 경우 여성의 사회참여 비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출산율도 높다는 사실은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준다. 아래 그림은 OECD 국가의 25~34세 여성 풀타임 고용률(주 30시간 이상으로 정의)과 출산율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Goldin(2016, 링크)에서 얻은 것이다. 이상치인 포르투갈 정도를 제외하면 여성의 고용률이 높은 국가일수록 출산율도 높아지는 관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개인 차원에서는 직장을 다닐수록 출산과 양육이 더 힘들 것이므로 직장여성이 많을수록 출산율도 적어져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처럼 정(+)의 관계가 나오는 것은 사회적 환경의 차이라는 공통요소가 여성의 고용률과 출산율을 함께 높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생산참여 확대는 출산율 저하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앞서 우리는 15~64세의 연령층을 생산인구라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 이 중 절반은 여성이다. 이 연령층의 여성이 생산에 나서지 않고 집에서 논다면 그만큼 생산인구는 줄고 부양해야 하는 인구는 느는 셈이어서 사회적으로는 곱절로 손해인 것이다. 한국의 여성들은 특히 결혼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을 겪는 경우가 많다.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서는 이들을 가정으로 보내는 게 더 나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저출산으로 인한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만드는 쪽이 더 낫다. 그렇게 하면 남성이 손해 볼 것이라는 생각은 단견이다. 여성이 가정에 묶이지 않게 되면 남성도 지금처럼 직장에만 묶이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결론을 내보자. 한국의 출산율이 급전직하한 것은 경제성장이 워낙 빨랐고, 여성의 사회지위는 그만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해소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요즘 나타나는 메갈리아 사태나 페미니즘 논쟁 같은 것들도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러한 사회변화의 일부분이라 생각된다. 정부나 기업도 아무 일 안하고 멍하니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너무 늦고, 너무 비효율적이고, 수동적이다. 저출산 대책 마련한다고 육아수당 몇 푼 쥐어주고, 미팅 주선하고, 청와대에 인구수석 만들고 해봤자 돈낭비에 비웃음만 살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출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저출산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출산율을 높이고 싶다면 거기에 쓸 예산과 노력을 여성지위 향상과 경력보호에 더 집중하는 것이 낫다. 나머지는 사회와 시장이 자연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다.

P.S. 

이 글에서는 연금제도나 국가재정 문제는 다루지 않고 있다. 출산율이 지금처럼 낮은 상태에서는 앞으로 국가재정이 파탄날 것이 예고되어 있는 셈이므로 이는 무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출산율을 높이려 하기보다는 연금제도를 수술하여 청년층에 부담을 전가하는 구조를 없애고, 재정수입 및 지출의 구조도 크게 수술하는 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본다. 이것들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최소한 가능성은 있는 반면, 단기간에 출산율을 높임으로써 연금이나 국가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보고 있다.    

요약

(1) 저출산 현상은 사회 전체적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국가재정이나 연금수급의 관점에서는 큰 문제이지만 생산과 소비의 관점에서 보면 생산이 줄어드는 만큼 비용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2) 한국의 출산율이 워낙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재정이 아닌 국민 생활수준의 유지 및 향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금보다 약간만 올라가도 괜찮을 수 있다. 

(3) 출산율이 비교적 높은 선진국들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및 생산참여 기회를 높임으로써 이를 달성했다. 저출산의 문제는 출산율을 높이는 정책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여성이 직면한 사회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불평등에 관하여 15: 시리즈를 마치며 > 불평등

이제 1년 여에 걸쳐 연재한 이 시리즈를 마칠 시점이 왔다.

맨 처음 불평등에 대해 공부를 시작하고 글도 쓰기 시작하게 된 동기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내가 젊은시절에 누릴 수 있었던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고, 둘째로는 나 자신이 경제학자로서 불평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 졸업 이후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들의 눈과 귀가 갑자기 진지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럴 때 나는 보통 희망섞인 이야기를 해 주기 마련이다. 열심히 하다보면 잘 될거야. 너희 선배들도 처음엔 힘들어 했지만 결국은 잘 됐어. 

낙관주의자여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여전히 내가 하는 말을 믿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는 마음 한 켠에 불안감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이들의 앞에 놓인 세상은 내가 생각하고 경험했던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흙수저로 태어나면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운 세상, 노력해 봐야 별 수 없으니 쓸 데 없는 데 힘쓰지 않는 게 최선인 세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리즈를 마칠 시점이 왔지만 나는 여전히 이 의문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 그래도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을 설명하는 하나의 거대이론(grand theory)으로 인정할 것은 최소한 아직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회의 불평등의 수준은 수 많은 현상과 그 사회 고유의 문제들이 결합된 결과로서 나타난다. 한 가지 또는 몇 가지의 뛰어난 정책수단으로는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심지어 불평등 문제를 직접 풀어 내고자 하는 정책들은 많은 경우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사실 이런 깨달음은 경제학자이자 사회과학자로서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예상도 가능했던 것들이다. 나로서는 다만 이를 재확인할 기회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미래는 여전히 우리가 풀어 나가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한 방에 해결하기는 어럽지만 우리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조금씩 해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상황은 좋아질 수 있다. 이 말은 꼭 낙관적인 희망의 메시지로 던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몰락한 사회들에 대한 사례가 역사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불평등에 관하여' 시리즈를 읽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

혼자서 공부해도 되는 내용을 굳이 공유한 것은 스스로에게 숙제로 만들려는 의도도 컸지만, 경제학자들의 접근법이 궁금한 분들에게 우리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경제학자들은 흔히 지나치게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비난 받는다. 굳이 부인할 생각은 없다. 뛰어난 경제학자일수록 열정을 표출할 순간을 가장 뒤로 밀어놓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노와 열정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는 이들에게 경제학적인 사고는 꽤 도움이 된다. 이 시리즈의 글이 그런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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