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열린 문 틈으로 한 학생이 비집고 들어왔다. 학생들에게는 언제든 환영이니 찾아 오라고 얘기하지만 내 말에 진정성이 없는게 느껴지는 지 실제로 찾아 오는 학생들은 많지 않다.
살짝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예쁘장한 얼굴의 여학생은 모 장학재단에 낼 추천서를 부탁하러 왔다고 했다. 교수라면 추천서께나 쓰는 줄 알지만 요즘 정식 추천서를 원하는 곳은 별로 없다. 추천서의 무게가 깃털보다 가벼워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의외로 긴 추천서를 쓰란다. 진짜 다 읽어 볼 생각인가?
"추천서를 쓰려면 자네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했더니 미리 잘 분류해 놓은 여러 장의 서류를 내 놓는다. 어디보자...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남동생과 살고 있다. 어머니 수입이 거의 없어 기초생활수급자 상태로 대학에 왔다. 이런 저런 장학금을 받긴 했지만 세 번 쯤 휴학을 했다. 치킨집, 커피점, 판매원 등 다양한 알바 경력도 있다. 그 와중에 괜찮은 업체에서 인턴도 해봤고, 교환학생으로 외국도 다녀왔다. 깔끔한 옷차림과 가방 안으로 삐져 나온 노트북 컴퓨터 때문에 잘 몰랐는데 아무 걱정 없이 산 눈매 같지는 않았다. 그 짧은 새에 편견이 자리잡았나?...아무튼 추천서를 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드물게 이런 요청을 받을 때면 생각한다. 수업 들은 것 말고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한테 속사정을 다 밝히는 기분은 어떨까? 지금까지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어서 무뎌졌을 수도 있겠다. 요즘은 취업 때도 보통 5-60곳 이상 자소서를 내니 거의 온 세상에 대고 광고를 하는 셈이다. 그 여학생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장학금을 받고 알바 하며 큰 탈 없이 학교를 다녔고, 돈 모아 교환학생도 다녀올 수 있었으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장학금이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다. 아침 저녁으로 알바 뛰어서 겨우 등록금 맞춰 내고, 휴학을 밥먹듯 하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 집에서 사고라도 치면 그 학기는 바로 중단이다. 학점은 바닥권을 헤맸다. 교수로서 창피한 일이지만 그들이 졸업해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지 모른다. 대학은 그런 곳이다.
내가 그런 학생들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할 리는 없다. 풍부한 집안은 아니지만 최소한 등록금을 걱정하며 산 적은 없었다. 더구나 난 그 냉정하다는 시장주의 주류경제학자 아닌가? 공감하려 노력해도 잘 안 될 듯하다. 그래도 걱정은 된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스펙을 다 갖춘 이들도 취업하기 어려운 요즘이다. 그 아이들이 과연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예전 가난했던 내 친구들처럼 아파트에 중형차도 굴리고, 사교육비 걱정에 불평은 하면서도 가끔씩 해외여행도 가는 그런 중년이 될 수 있을까?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의 확대가 큰 화두다. 내 전공과는 거리가 있지만 작년 초부터 틈틈이 관심을 두고 보고있었다. 마침 피케티 열풍이 불면서 각종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면에선 피케티가 참 고마운 일을 했다). 물론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지적한 그의 주장은 문제가 많다 (고백하자면 책 읽고 나서 좀 안도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불평등의 확대가 실존한다면 여전히 그에 대한 대답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대답을 내가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 정도의 능력자는 아니다) 한 번 생각해 보고 싶다는 정도다. 이 글은 전반적인 상황을 정리해 보고 사람들과 의견도 나눠보고 싶은 의도에서 시작한다. 논문도, 논평도, 에세이도 아니고 그냥 무형식 잡글일 예정이다. 피케티 주장에 대한 평가도 물론 포함된다.
Disclaimer: 저는 비록 경제학자이지만, 지난 20여년 동안 거시/노동/공공재정 경제학 등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불평등 문제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평생 정신과 의사로 살아 온 사람이 심장수술에 대한 글을 쓰는 격이죠. 따라서 앞으로 제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소의 의심을 갖고 봐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쯤 10여 번 정도로 나눠서 써 볼까 합니다. 이렇게 미리 선언을 해 놓고 나면 스스로 제약이 되어서라도 글을 쓰길 바라는 데 특유의 게으름 때문에 또 언제 중단할 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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