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익 컴플렉스, 안종범, 그리고... > 법제도와 정치

내가 유학했던 학교의 경제학과 건물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실물크기 초상화가 걸려 있다. 1990년대에 새 빌딩을 지어 이사를 가면서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 김재익 수석을 기념하는 방을 하나 만든 것이다. 나는 바로 그 방에서 박사학위 논문의 최종심사를 받았다.

젊은이에게는 영웅이 필요하다. 롤모델이어도 좋겠다. 김재익은 한 경제학도의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위기에 처했던 한 나라의 경제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 매년 30%씩 오르는 게 당연하던 물가를 한 자리수 이하로 잡았고, 금융실명제, IT산업 진흥, 시장개방 및 자율화를 추진했다. 당시로서는 전혀 당연한 어젠다가 아니었고 반대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비전은 이후 30여년 동안 우리경제가 따라가게 된 (일부는 아직도 채 따라가지 못한) 길이 되었다. 그가 아웅산 테러로 불의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물론 사람의 일은 알 수 없긴 하다.

김재익은 전두환의 가정교사이자 경제수석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독재자의 부역자였던 셈이다. 그런 김재익을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정치적으로 나와 반대되거나 심지어 모두가 미워하는 이의 밑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경제학자로서 뜻을 펼치고 세상에 공헌할 수만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은연중에 그런 생각이 자리잡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치는 정치고, 경제는 경제아닌가 말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한국도 더 이상 1980년은 아니고 나도 김재익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래도 김재익 컴플렉스는 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안종범 수석의 일이 꽤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을 보니 말이다. 나는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석에서 한 두번 만난 적이 있다. 어느모로 보나 정상적인 경제학자이고, 옳은 판단력을 갖춘 사람으로 보였다.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서 한 사람의 경제학자로서 역할을 하다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안종범 수석이 왜 나락에 빠졌는지, 그가 큰 벌을 받아 마땅한지 아니면 억울한 면도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 듯 싶다. 나는 그가 원래부터 권력의 해바라기나 탐욕의 화신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권력의 틈새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키는 데 실패한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본다. 나라면 과연 다를 수 있을까? 나 스스로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남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높다.

어쩌면 오랜동안 가지고 있던 김재익 컴플렉스를 완전히 놓게 되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뭐 어떤가? 스스로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더 이상한지도. 아무튼 내일은 아들과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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